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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인 마음 상태지만 그래도 외치고픈 건 하나님! 사랑!

Brave Chan 2016. 8. 13. 20:36

며칠전인가 운전하면서, 터널을 지나면서 외롭다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나는 다시 또 혼자가 되었다고. 


해외에서 보낸 청소년기의 저는 굉장히 개인주의적이었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편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친구란, 학점을 잘 받기 위해 공부잘하는 애들하고만 사귀고, 그 이상의 친밀한 교제는 하지 않았습니다.  내 학점, 내 커리어만을 생각했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재미없는 대학생활이었습니다.  펍에 가서 기절할 때까지 술도 마셔보고, 파티에서 광란의 밤도 보내고 그래야했었는데, 저는 해외 인턴을 알아보고 이력서 다듬고 기차타고 면접보러 다니고.  왜 그렇게 나는 내 자신을 몰아쳤을까, 좀더 여유있게 느슨하게 보냈어도 됐는데..

타인에게 마음을 열 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내 안에 결핍을, 내 커리어의 성공으로 풀려고 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고등학교때 같이 기숙사 생활을 동고동락했던 외국 친구들이랑은 꾸준히 연락하면서 지냈지만, 굿바이 인사도 없이 귀국해버렸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맹목적으로 내 일, 내 사업만 생각하는 버릇은 여전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마땅히 연락할 친구가 없는 건 당연했지요.  



그때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친밀하지도 않았고, 한국에서도 만날 사람이 딱히 없으니 부모님이 보시기에 제 상태가 안 좋아보였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거듭되는 권유로 다시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2년 후, 여친과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을 때, 저는 다 떠나서, 나에게도 단짝, 짝꿍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아무 목적, 의도 없이, 미래 계획도 없이 마냥 사랑했습니다.  여친과 사귄 1년 동안에는, 업무상 관계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적인 관계성은 제로에 가까왔습니다.  



이 모든 건 1년이 지나고 나니, 깨닫는 것들입니다.  그 당시는 너무 사랑을 사랑한 나머지, 주변 것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실적 인 것, 미래도, 내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서도.  결국, 여친과 갈등이 조금씩 생기면서 제 성정체성을 깨달아 갔으니, 제가 제 자신과 주변에 얼마나 무디고, 무심한지요. 



얘기가 딴 길로 샜는데, 그래서 터널을 지나면서.. 

'하나님 나 또 혼자가 됐어요.  저는 이런 팔자인가봐요.  지난 1년은 제게 너무 과분했던 날들이었나봐요.  하나님도 없었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요.  나는 누구에게 내 속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라도 계셔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속으로 혼잣말했었습니다.  

다음날, 설교묵상글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라고 나온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소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내 속마음을 몇시간이고, 나를 위하여 열심히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돈 내고 상담해주는 카운슬러 밖에는 없더라구요.  아무리 트랜스젠더라는 성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고,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앞두고 마음이 혼잡해도, 아무리 끔찍히 사랑했던 여친과 헤어져도, 남에게는 그저 수많은 연애사 중에 하나입니다.  


세상은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별거 아니라고, 다른 여자 만나보라고,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혀진다고. 내 사랑은 힘든 케이스라고, 쉽지 않다고, FTM친구들이며 커뮤니티며 주변에서 위로해줍니다.  



맞아요.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도, '이게 가능한 일이야?' 싶지 싶어요.  결혼이라니, 트랜스젠더가 되어서 이성애자인 여자친구와 결혼이라니.  



여친이 '남자로 태어나지' 원망 섞인 듯한 아쉬움을 여러번 토할 때마나, 웃어 넘겼던 내가 한심해요.  여친이 한 말들을 기억속에서 꺼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다 떠나서, 여친이 근심걱정으로 힘들어할 때, 여친의 그러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해요.  여친의 감정은 헤아리지 않고,  제가 계획한대로 밀고 나아가려고만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가장 위로 될 때가 바로 내 마음을 알아줄 때인데, 저는 여친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참 느린듯 빨리 흘러갑니다.  어느덧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려고 한 날 D-1 입니다.  최근 하나님이 제게 경외하라는 말씀을 많이 주세요.  그리고 공손하라고. 



젠으로 살아간다는 게, 현실적으로 녹록치가 않은 일이잖아요?  

사실 매일아침, 이런 생각 합니다.  에이 그냥 차라리 그냥 이 모습 그대로 살아갈까, 그냥 평범하게, 이렇게 지내왔던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어떨까.  잠깐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과 대립하게 되는 거죠.  아니 그냥 평범하게 살아갈거면, 그냥 생긴대로 살아갈거면,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지? 왜 나는 다른 성소수자들에게 마음이 쓰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든거지?  내가 그냥 여자로 계속 살아간다면, 내 알 바 아니잖아?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아리쏭 한 겁니다.  매일 아침 출근 준비할 때 이 아리쏭함에 빠져들어요.  그래서 어제 큐티묵상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불확실성'과 '생존 vs. 사명' 에 대한 주제였습니다.  설교요약 본문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히11:1~6  불확실하기에 오히려


인생을 살다보면, 중요한 선택을 해야하는 갈림길에 놓일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상하게 우리를 확실하지 않은 쪽으로 인도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못 신뢰하고 의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말 기도 열심히 하며 믿고 의지하는데도 하나님은 애매모호한, 앞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곳으로 인도하세요

 

하나님이 그러시는 이유는, 

안전과 확실함이 보장되는 곳보다, 불안정하고 불확신한 쪽으로 이끌어 가시는 이유는, 

그 긴장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게 있기 때문이라고.  거기서 믿음과 겸손을 얻게 하기 위함이고, 또 그것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소중한 자산이 되기에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40년인데, 광야는 불확실성의 상징입니다.  우리 생활도 광야 생활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매 순간 광야생활로 몰아넣는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겸손하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본문) 

모든 게 확실하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믿음이 필요할까요?

눈에 빤히 보이는데 믿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냐 그거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 분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또 상 주시는 이심을 알게 될 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조건이 되는 상황이 뭐냐?

바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순간순간 물으십니다.

“너 확실한 곳에서 나 없이 살래,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나와 친해 지면서 믿음으로 살래?” 

저와 여러분의 결정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불확실하지만 하나님 믿고 의지하는 그 길을 가야 될 줄 믿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지금 제 상황이 그래요.  트랜스젠더가 되려고 하는 것, 가족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 트랜스젠더로의 삶, 이 길을 갔을 때 과연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건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할 수 있을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붙들고 늘어질 수 밖에 없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그걸 알았고, 하나님만이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하실 분이고, 저는 그분 앞에 그져 엎어져서 나를 붙들어주시길 바랄 뿐이에요.   트랜스젠더로 살아야 하냐, 아니야- 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내가 그분과 평생토록 긴밀하게 교제할 것이냐, 아니야 를 매순간 생각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트랜스젠더로의 삶 결혼, 커밍아웃 이것만 생각하면 한숨 푹푹 꺼지는데, 하나님하고 가까이 붙어있는 삶을 살래? 라고 하면 답이 1초만에 나와요. 



그러면 또 이런 생각이 들죠.  하나님 그럼 저는 평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야 하는건지요? 라고 여쭙게 됩니다.   그래서 두번째 큐티한 내용은 '생존 vs 사명' 에 대한 거였는데 본문에 '사명'이라는 게 뭔지 나옵니다.  플러스 사랑, 결혼에 대한 얘기도 나오니 재밌어요ㅎㅎ 

길면, 제가 색깔로 표시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셔도 됩니다.  그치만 꼭 읽어내려가시길! 




고전9:13~18  생존인가, 사명인가?

* 위 본문은 꼭 읽어보시길 권유드립니다.


먼저 사명은 사랑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건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지요?

잊으려고 했더니 잊혀졌다! 그러면 그건 사랑 아닙니다. 헤어지고 나니까 시원했다! 그건 사랑 아니지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뭔가 나도 모르게 하는 것,

그래서 절대로 거기서 손을 못 놓는 것,

그게 사랑과 사명의 공통점입니다. 해서 적어도 사명이라면, 거기엔 어떤 방해나

난관이나 몰이해가 있더라도 뚫고 나갑니다. 그것도 뭘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상황 자체가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겐 그런 게 있습니까? 아직도 자기 사명이 뭔지 모르시는 분은 빨리 자기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내게 심어 주신 뭔가가 반드시 있다는 겁니다. 사명은 바로 그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땅에서 제일 능력 있게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의 결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이것보다 강력한 인생은 없습니다.

사명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시급한 일입니다.


해서 어떤 한 사람에게 사명을 빨리 깨닫게 하려면

그 주변 사람들이 좀 방해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얘긴가 그러실 텐데요.

오래 전에 제 후배 중에 이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전혀 아닌데 신학교를 가겠다는 거예요.

어릴 때 자기 어머니가 서원을 하셨다는 겁니다.

해서 자기는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야 할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보니까 교회 잘 안 나가는 것은 둘째치고,

그 친구가 있는 곳엔 언제나 분열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하여간 성격이 여간 모난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친구 몇 명이 그 후배를 막 몰아 부쳤습니다.

“너는 마! 신학교 가면 금방 짤려, 가지마! 신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너 같은 놈을 누가 전도사로 쓰겠냐?

네가 목사라면 너 같은 애를 쓰겠냐? 한 번 생각해봐라!”

뭐 이런 식으로 막 엄포를 놓고 너는 아니라고 그랬더니

얼마 있다 보니까 생맥주 집에 취직했더라구요.

이런 건 사명이 아니지요?  

조그만 엄포와 회유에도 설득 당하면 그건 사명이 아닙니다.

진짜 사명이면 웬만한 방해가 있어도 다 뚫고 나가는 법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결혼시키고 싶으면 주변에서 방해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아니야, 힘들 것 같다! 불행의 씨앗이야! 쪽박 찰 상이야” 등등 온갖 말로 방해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나고, 하루라도 안 만나면 못 배기겠다 그러면 그건 진짜입니다.

그런데 진짜 얄미운 사람을 방해하고 싶으면 자꾸만 부추기면 됩니다.

“야! 그 사람 정말 멋있더라.” “왔어! 꼭 물어!” “마지막 기회야!” “지금 네 나이가 몇 살인지 아니?”

등등 이렇게 부추기면 끝에 가서는 거의가 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명은 환경과 관계없이 내가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길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사람이 다 사명으로 살아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명으로 사는 사람의 반대를 말씀 드리자면 그건 생존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존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먼저 생존으로 사는 방법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은 언제나 생존의 차원을 뛰어 넘어야 의미를 발견하는 법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명을 알게 되고 그래야 그때부터 최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존으로 사는 것은 그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머물러 있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의 작전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평생 생존에 매달려 살도록 유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오래 동안 이 문제에 시달려 왔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생존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절대로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생존의 책임이 내게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흔한 얘기로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야!”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먹이시고 마시우고 입히시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이라는 거예요.

마6:26을 보세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시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느냐”

여러분! 새들이 굶어 죽는 것 봤습니까?

가끔 포수의 총에 비명횡사하는 경우는 있어도 굶어 죽는 새는 없습니다.

그런 미물조차도 하나님이 다 먹이신다는 겁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얼마나 더 소중한 존재입니까? 

또 마6:28절에 보면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여러분! 백합이 얼마나 예쁩니까?

그런데 그 백합도 자기가 수고해서 입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입히셨다는 거예요.

이렇게 새와 백합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이 우리를 굶기시고 벌거벗고 살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말씀 드립니다.

생존은 하나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생존은 하나님의 영역이지 우리 영역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사명으로 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생존을 뛰어넘어 사명의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해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내 사명을 빨리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해 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명이란 무엇일까요?

아시다시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형상의 대표적인 게 그 분이 가지신 성품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뭐지요?

예!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형상대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표적 상징이 십자가입니다.

해서 명이란 다른 말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좀 더 쉽게 설명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의 삶’입니다.

이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 사명적인 존재로, 사랑의 존재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살면 거기엔 만족이 없습니다.

그건 가장 불행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면 거기엔 만족이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면, 우리는 그 내어줌을 통해 인간됨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기쁨은 세상 것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있지요?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도 또 내 자신까지 내어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 12:15)


사랑하니까 물질 뿐 아니라 내 자신까지도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자기가 고린도 교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부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명인 겁니다.

이 사명의 문제와 관련해서 제일 먼저 점검할 것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문제가 올 때도 자기 정체성을 점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명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자기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헌신하는 대상이 뭔지를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고

그것은 바로 내 사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또는 누구에게 헌신하고 계십니까?

헌신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그걸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게 바로 여러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야 복음에 헌신했으므로 그의 사명은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즉 바울은 복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나 야구에 헌신합니다.

그런 사람은 축구나 야구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음악을 공부하고 있고 헌신의 대상이 음악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음악입니다.

사명은 헌신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보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보면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묻기도 어렵다는 겁니다.  아예 헌신의 대상이 없습니다.

사명이 뭐냐 물어보면 그냥 웃기만 합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종종 헌신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헌신의 대상이 엉뚱합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에 헌신하고 어떤 사람은 도박에 헌신하고 어떤 사람은 투기에 헌신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라는 우상에 헌신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이름은 쾌락이요, 도박이요, 투기요, 우상숭배인 겁니다.

사명은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이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명은 잘못된 사명이요, 잘못된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헌신의 대상을 명확히 알고 바른 헌신을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별개의 사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즉 여러분의 사명은 여러분의 은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해서 은사를 사명으로 여기고 그 결대로 살아가면 여러분의 인생은 억지로 살지 않고 쉽게 살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만 여러분 안에서 감각이 살아나고, 베스트가 나오며, 행동은 자연스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인생은 최상의 삶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생존으로 살려고 하면, 즉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입고 좀 더 편하게 살자 하고 돈돈 하면

여러분은 은사든 감각이든 베스트든 행동이든 그 어떤 것도 나올 수 없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생존으로 살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생존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다른 이들을 위한 헌신에 올인 하십시오!  

바로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고 바로 그게 사명자 본연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사명자입니다.

사명자로서 바울처럼 헌신하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또 그 분이 일하게 하는 방법은 다른 게 아니라 그저 믿는 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고 그래서 그 분이 내 삶을 이끄신다는 그 믿음만 드리면

하나님은 “OK!” 일하신다는 겁니다.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 주신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삶 속에서 그런 믿음의 시작은 바로 ‘생존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이 친히 나를 위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사명으로 사시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믿어야 할 것은 생존은 내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이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아서 요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한 묵상인데 다시 한번 묵상하고 있습니다.  

몇시간 전 만해도, 불안했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평온합니다.  이제 이 포스팅을 마치고 나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교회 예배실에서 기도 드리고 내일 부모님께 얘기하려 합니다.  

부디, 성정체성 문제로 고민 중인 크리스찬이시라면, 같이 기도하며 나아가길 바랍니다.  

우리의 사명, 내 사명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하나님께 아뢰며 나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게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에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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